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봉오동 전투(영화)/고증 (문단 편집) == 인터뷰 == * 원신연 감독은 독립신문 88호를 근거해서 만들었다고 증언하며 봉오동 전투는 독립신문 88호에 정확히 기록이 되어있다고 발언했다. >__역사적 사실 근거로 하는 영화를 만들 때__ 보통 영화를 기획하고 시나리오 써서 그냥 만들 때보다 __훨씬 많은 공과 많은 시간 신경을 써서 자료를 수집해야 하고, 그런 자료들이 체화됐을 때 비로소 영화로 내놓을 수 있다__. 봉오동 전투는 자료 수집, 고증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다양한 난관에 봉착했다. 남아있는 사료가 거의 없다. 그 이전 시대, 조선, 고려 시대 자료가 훨씬 많이 남았을 정도. 일제는 영화에서도 기록돼서는 안 된다고 말할 정도로 __철저히 숨기고__ 왜곡했다.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__'''독립신문에 정확히 기록'''된 게 봉오동 전투의 승리, 전 후의 과정이 남아있다. '''독립신문 88호 기록을 근거해 만들었다'''.__ >---- >감독의 발언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421&aid=0004119893|뉴스 1]] 감독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는 영화를 만들 때 제대로 자료를 수집해서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하며 관련자료를 일제가 은폐했다고 발언했다. 그러면서 근거로 했다고 설명한 게 독립신문 이며 봉오동 전투는 "독립신문에 정확히 기록"이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관련 전문가들의 분석과 사료 교차검증을 보면 알겠지만 독립신문은 정확히 기록한 것과 거리가 멀다. [[봉오동 전투]] 문서에서 인용 된 박창욱 교수와 강룡권 연구원 자료를 참고. 그리고 위의 발언에선 독립신문보다 중요한―한인 독립운동가와 중국측의 사료― 사료가 언급되지 않는데, 왕청현 5구 순방분소장 서육린의 보고서와 간도국민회 북부 제2지방회 회장 김정의 문헌으로 독립신문보다 훨씬 중요한 문헌이다.[* 인터뷰로 말할 때는 국민회나 중국 연길 측의 보고서 등으로 짧게 말할 수도 있다.] >__1920년 6월 연길도윤공서 외교과의 「汪淸縣呈報韓亂事件」은 봉오동전투에 대한 조사자료__이다. 본 자료에 의하면 1920년 6월 7일 새벽 3시, 야스가와 소좌가 영솔한 130여 명의 隊伍는 고려령을 넘어 초모정자 십자구에 도착하여 독립군과 싸웠는데, “독립군 사살 1명, 부상 1명, 일본군측 사살 병사 49명, 군관 3명. 독립군은 일본 38식 장총 13자루를 노획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__본 자료는 왕청현 5구 순방분소장 서육린이 일본군의 뒤를 추적하다가 전투가 결속된 직후 “冒險을 감수하면서 전장으로 들어가” ‘토민’들로부터 조사, 문의하였고, 6월 9일에는 직접 독립군의 주둔지로 들어가 홍범도와 최진동 등 지휘자들과 면담한 후 돌아와 보고한 내용이다__. 이에 의하면 당시 출동한 일본군은 신미중위가 거느리는 17명의 남양수비대와 야스가와 소좌가 영솔한 보병 1개 중대 기관총 소대, 도합 軍隊 200명, 경관 10명, 헌병 8명이다. 그런데 과거의 일부 사서에서는 대체로 독립군 “적 150명을 섬멸”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어느 정도 과장된 숫자라고 생각된다. 당시 일본군의 월강추격대의 병력은 200여 명인데 만약 150여 명을 섬멸하고 여기에 부상자까지 합친다면 일본군을 ‘전멸’한 것이 된다. 이는 역사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__‘적 150명 섬멸’, ‘사살 60명, 부상 50명’ 등등은 당시 간도국민회 본부에서 통계한 것인데 이 통계자료를 상해 독립신문 에서 그대로 인용하였던 것이다__. 다음으로 __간도국민회 북부 제2지방회 회장 김정의 명의로 발표된 자료__에 관한 문제이다. 이 자료에서 는 “7일 오전 10시 개시, 전투는 잠시 계속되다가 적들이 점차 패주함. 그 전말은 다음과같음: 적 사살 대대장․중대장․주사관 각 1명, 병사 49명, 부상자 不知其數임. 아군의 황하백, 군인 주택열 2명 순직, 부상자 2명, 피살 부녀, 아동 16명, 소 6두, 개 2마리. 전리품은 무기 20정 및 기타 잡품 약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위의 북부 제2지방회 본부 소재지는 석현인데 봉오동도 그 관할 내에 들어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해당 __지방회소에서 발표한 전투상황은 현지 조사에 기초한 것으로 평가__된다. 그리고 부녀와 아동 사자 16명이라 하였는데 이 숫자도 사후(7월 3일) 일본경찰 和久井을 위수로 한 조사단이 조사한 결과와 비슷하다(일본측의 조사에는 사자 18명, 소 5두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대대장․중대장격사’설은 실제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대장은 월강추격대의 야스가와 소좌를 가르키는 것인데 사실상 야스가와 소좌는 이번 전투에서 격사되지 않았던 것이다. 當日 전투 결속 후 야스가와는 잔여부대를 거느리고 南洞에서 남쪽의 琵琶洞, 空洞山을 경유하여 유원진으로 퇴각하였으며, 6월 9일 조선 내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몇 달 후, 즉 동년 10월 21일의 백운평전투에서 야스가와는 또 다시 山田支隊의 선봉대 대장직을 맡고 선발부대를 거느리고 북로군정서부대와 교전하였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봉오동전투에서 대대장이 사살되었다는 것은 실제와 부합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사살한 병사와 장교의 총 숫자(즉 52명)가 왕청현에서 보고한 내용과 일치하며, 백성 사망자 수(일본측 통계는 18명, 중국 관방측의 통계는 15명, 소 5두) 및 손실상황도 비슷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봉오동전투의 戰果는 마땅히 “적 사살 52명, 노획한 무기 13~20, 我독립군 戰死 2명, 부상 2명”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인정된다. >---- >박창욱, 東北 지역 한민족독립운동사 관련 사료 상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8, 2002, [KCI 등록된 번역본 기준] 5, 6쪽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0851809|#]] 위의 논문에서 볼 수 있듯이 두 보고서가 훨씬 중요한 보고서다. 심지어 현장 근처에 주둔하는 인물들이 현장에서 조사한 자료다. 독립신문은 오히려 사실적 보도라기 보다는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쓰여진 선전신문이다. 그러나 감독은 중요 자료를 냅두고 뜬금없이 독립신문 88호를 언급하고 있다. 심지어는 같은 독립신문의 최초보도인 1920년 6월 22일호를 보면, 일본군 피해를 사상 12명으로 적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이 최초보도는 아예 무시하고, 나중에 발행된, 윤색된 독립신문만을 참고하고 있다. * 인터뷰에서 원신연 감독은 고증에 맞췄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실제 역사이기 때문에 왜곡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극중 인물의 옷차림부터 머리 스타일까지 조심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런 부분은 철저히 사진 사료 등을 통해서 신경 써서 만들었다.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상황을 재구성을 했을 뿐 삼군자 전투의 승리부터 죽음의 골짜기에서의 대승까지 모두 사료에 기록된 부분이다. >---- >감독의 발언[[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76&aid=0003450545|스포츠조선]] 그런데 아래에서 보듯이 실제로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맞지가 않는다. * 위의 인터뷰에선 감독은 "어떤 부분[* "어떤 분"을 기자가 오타낸 것으로 추정]이 블로그에 독립군이 기관총을 쏘지 않았다고 장문의 글을 쓰신 걸 봤는데, 기관총이 있었다는 사료가 너무너무 많다.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 있는 자료에 밀정이 일본군에게 보고한 문서를 보면 '독립군이 기관총을 가지고 있다'는 게 명확히 기록돼 있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76&aid=0003450545|#]]고 주장하는데 정작 '어떤' 독립군이고 '어느 시기'인지 여부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 게다가, 극중 인물의 옷차림부터 머리 스타일까지 조심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는 감독의 발언과 달리, 위에서 지적했듯 영화 속 옷과 두발 고증은 처참한 수준이다. 비록 한국 영상물 제작 업계의 고증 수준이 여전히 뒤떨어지긴 해도, 봉오동 전투보다 앞서 나온 암살 등의 영화에선 기존보다 확연히 복장 등의 고증 면에선 나아진, 설령 틀렸어도 어떻게든 연구하고 고증을 지켜 보려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등 점차 고증 수준이 나아져 가는 와중 이를 역행한 것이다. 게다가 자료가 적은 먼 옛날도 아니고, 20세기 일본 육군의 피복과 두발 상태 등에 관한 자료는 일본 웹사이트나 아마존 재팬 등에 널렸다. * 인터뷰를 보면 일본군의 중국인 학살 사진을 조선인 학살 사진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있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 일본군들이 조선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들은 실제 자료 사진들을 참조해서 각도까지 일치시키려 했다. __일본군이 조선인의 목을 베어 들고 포즈를 취한 사진__, 그런 것들은 잔인함을 보여주기 위한 잔인함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우리가 견뎌야 할, 그래서 이겨야 할 잔인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잔인함에 당위가 분명한 응징을 보여주기 위한 표현들이었다. >---- >감독의 발언[[https://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802403|스타뉴스]] 일본군이 중국인을 학살한 사진에는 그런 내용이 있다. 그러나 조선인의 목을 베서 손에 든 채로 포즈를 취한 사진은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군이 중국 영토에서 중국인의 목을 베서 들고 있거나 포즈를 취한 사진이라면 여러 개가 있으나 조선인 관련 사진은 확인되지 않는다. 포즈를 취했다는 내용은 아무리봐도 일본군의 중국인 학살 사진과 매우 유사하다. [[http://historyworldwar2-bodong.blogspot.com/2010/11/brutal-japanese-rape-of-nanking-1937.html|일본군의 중국인 학살 사진]], [[https://en.wikipedia.org/wiki/Nanjing_Massacre|위키피디아에 있는 일본군의 중국인 학살 사진]] 혹시 글을 읽는 사람 중 일부 사람들은 '피해자의 국적은 상관없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국적에 상관없이 일본군의 중국인 학살을 규탄하면 될 텐데 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중국인 사진을 조선인으로 소개하는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